혜초 왕오천축국전

 

'왕오천축국전'은 신라의 스님 혜초(704년 ~787년)가 727년 인도와 주변의 여러 나라를 순방하고 돌아와 쓴 여행기다.

 

여기서 천축국은 지금의 인도를 말하며, 당시 인도가 다섯 지방, 동천축,서천축,남천축,북천축,중앙천축 으로 나뉘어있었기때문에 오천축국이다.

 

 

 

 

 

 

1908년, 프랑스의 동양학자 펠리오가 중국의 간쑤성지방을 탐사하다가 돈황의 명사산 천불동이라는 곳의 바위굴에서 수많은 유물을 찾아냈다.

 

그 가운데 앞뒤가 떨어진 책 두권이있었다. 그것이 바로 혜초가 지은 왕오천축국전이었다.

 

 

 

 

왕오천축국전은 긴 두루마리로 된 것으로 옛날의 한문책으로 치면 30여 페이지 밖에 되지않는다. 그나마도 앞뒤가 떨어져 나간 보잘것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지닌 가치는 수십권 분량의 책 못지 않게 한국인의 기상을 세계 만방에 떨친 세계적인 보물이다.

 

 

by apple_애플 2014. 8. 27. 23:19

[김생]신라의 명필 김생

 

신라 성덕왕 10년인 711년에 태어난 김생은 중국 사람들도 혀를 내두른 명필이었다. 그러나 그가 누구의 자손인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김생은 어려서 부터 신동 소리를 들을 정도로 붓글씨를 잘 썼다. 전하는 말로는 쇠꼬챙이를 들고 모래밭에서 붓글씨를 연습했다고한다. 옛날에는 종이와 붓 등이 귀하고 비쌌는데 김생은 가난한 집안의 아들이었다.

 

 

 

홍권이라는 사신이 중국 송나라에 갔을 때였다. 송나라 친구인 양구와 이혁등이 황제의 칙서를 들고 홍권의 숙소를 찾아왔다.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붓글씨에 대한 화제를 떠올렸다. 그때 홍권이 짐속에 넣어 온 김생의 글씨 한폭을 보여줬다. 송나라 친구들은 눈을 크게 떴다. 왕희지의 글씨를 보게되어 반갑다는 것이었다.

 

 

 

홍권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것은 왕희지의 글씨가 아니라 신라의 김생이라는 사람의 글씨라 말하였다. 이후 김생의 명성은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김생을 해동서성 이라고 극찬할정도였다.

 

중국사람들은 우리 나라에 오면 김생의 글씨를 구하려고 여러가지 수단을 동원하였다.

해동은 동쪽에 있던 우리 나라를 일컬으며, 서성은 붓글씨의 성자라는 뜻이다.

 

 

by apple_애플 2014. 5. 12. 00:50

[신라 개국 박혁거세]신라를 세운 박혁거세

 

지금의 경주인 서라벌 일대와 월성군 일대는 옛날 진한의 땅이다.

진한은 여섯 부족이 똘똘 뭉쳐서 의좋게 나라를 이뤄가고 있었다.

 

그러나 여섯 부족을 하나로 이끌 지도자가 없었다. 그래서 여섯부족장들은 그들을 다스릴 임금을 한분 모시자고 했다.

 

 

 

기원전 69년 고허촌 부족장 소벌공이 양산 기슭을 보니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나정이라는 샘가에 눈처럼 흰 말이 엎드려 울고 있는 것이었다. 또한 하늘에서 신비한 빛이 내려와 말을 앞을 비추고 있었다.

 

괴이하게 여겨 달려가 보니 말은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 버리고 그 자리에는 커다란 알이 하나 놓여있었다. 소벌공은 말이 날아올라간 하늘에 대고 절을 한뒤에 조심스레 알을 깨봤다.

 

 

 

여섯 부족장들은 박처럼 생긴 알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성을 박 이라 하고, 밝게 세상을 다스리라는 뜻으로 이름을 혁거세 라고 했다.

 

그가 바로 신라의 시조이자 박씨의 조상인 박혁거세다.

 

 

박혁거세는 왕호를 거서간 이라 했는데, 이말은 진한 말로 임금이라는 뜻이다. 그는 나라를 잘 다스리다가 서기 4년에 죽었는데, 알영과의 사이에 남해라는 아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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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pple_애플 2014. 5. 7. 08:23

[한국의 사찰]고창 선운사

 

전북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에 위치하고 있는 선운사는 금산사와 더불어 조계종의 전북 도내 2대 본산으로서 명승고찰로 유명하다.

 

선운사의 창건에 대하여는 백제 위덕왕 24년(577)에 검단선사 가 창건했다는 설과 다른 설로는 검단선사가 신라의 국사요 진흥왕의 왕사인 의운국사와 함께 진흥왕의 시주를 얻어 개창했다고 전해진다.

 

 

[출처 - 문화재청]

 

선운사는 도솔암, 참당암, 석상암, 동운암 등 4개의 암자와 석탑 그리고 본절 경내에 천왕문, 만세루, 대웅전, 영산전, 관음전 ,팔상전, 명부전, 산신각등 10여 동의 건물을 지니고 있다.

 

보물 제290호로 지정되어 있는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맛배지붕 양식을 가진 다포계 건물이다.

 

 

[ 출처 - 문화재청 ]

 

보물 제 280호로 지정되어 있는 금동지장보살좌상은 고려후기의 특징적인 불상양식인 단아양식 계열의 상이다.

 

온화환 표정의 단아한 얼굴과 단정한 자세를 보이는 지장보살상으로 단순하면서도 명쾌한 복식의 표현, 승각기의 치레 장식 등 특징적인 세부 양식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모습의 선운사 지장보살은 고려 후기의 귀족적인 불교미술의 일면을 표현하고 있는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할수있다.

by apple_애플 2014. 4. 14. 11:10

[승정원 일기]국왕의 비서실 승정원 일기

 

승정원은 조선 정종대에 창설된 기관으로서 국가의 모든 기밀을 취급하던 국왕의 비서실

 

이라 할수 있는 곳으로 1623년 3월부터 1894년 6월까지 272년간 승정원에서 처리한 국

 

정 기록과 승선원, 궁내부, 비서감, 규장각으로 명칭이 바뀌면서 1910년까지 총 3,243권

 

의 기록이 남아있다.

 

 

 

내용을 보면 국정 전반에 걸친 광범위한 사실의 기록으로 이책의 기재방식을 보면 한 달

 

을 기준으로 책머리에 월간 경연상황 을 기록하고 승정원의 관리 및 당직자의 표시와 근

 

무실태를 표시하고 마지막으로 승정원의 업무현황, 황 및 내전의 문안등에 대해 기록하였다.

 

 

17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일기로 300년간의 국문학의 변천과정을 확일할수 있는 국문

 

학적 가치가 인정되고 있으며, 288년간 매일의 날씨 정보를 기록한 것으로서 역사의 기초

 

자료가 되고있다.

 

또한 전통적인 유교사회 내부로부터 자생적인 천주교 수용이 민중들 사이에 어떻게 전개

 

되었으며 이에 대한 정치권의 대응등을 자세히 살필수 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승정원 일기는 원본은 보존을 위하여 공개하지 않고

 

있으며 1851년부터 1910년까지의 일기 필사본만 인터넷으로 제공하고 있다.

by apple_애플 2014. 4. 13. 22:35

[경주 불국사]경주 불국사

 

토함산 서남쪽에 자리잡은 불국사는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당시 재상 기댐성에 의해 기공되고 혜공왕 10년(774)에 이르러 80여 동의 목조건물이 들어선 대가람으로 완성되어 신라 호국 불교의 도량으로서 법등을 이어왔다.

조선 선조 26년(1593) 왜병의 침입 방화로 인해 650년간 내려오던 불국사의 건물이 모두 불타버렸다.

 

1969년에서 1973년에 걸쳐 창건 당시의 건물터를 발굴조사하고 그 자리에 다시 세움으로써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출처 - 문화재청]

 

다보탑은 눈에 보이는 물질의 아름다움이요, 석가탑을 마음에 비치는 정신세계의 아름다움으로 균형을 이루고있는 신비한 탑이다.

 

 

[출처 - 문화재청]

 

법당 안에 있는 부처님과 정삼각형을 이룬 위치에 자리잡고 하늘과 땅이 하나로 융합된 가운데 석가여래의 설법은 다보여래의 증명에 의해서 영원히 불국에 다함이 없다. 불국사의 다보,석가 두탑은 둘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둘인 것이다.

 

다보탑은 사면에 8층계단을 가설한 삼층탑으로 탑의 높이는 10.4m 이며 국보 제20호로 지정되어있다.

 

by apple_애플 2014. 4. 13. 00:52

[호동왕자 와 낙랑공주]호동왕자 낙랑공주

 

후한의 광무제는 낙랑군의 태수로 최리를 임명하게 됩니다.

낙랑군의 태수로 부임한 최리는 임무의 막중함을 알고 국경의 수비를 철저히 관리합니다.

낙랑군 태수 최리는 사냥을 하고 돌아오다가 고구려 왕자 호동과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호동은 무예가 뛰어났 을뿐만 아니라 예의도 바르고 훤칠하였습니다.

 

 

 

태수에게는 낙랑의 미인이라 불리우는 딸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어 최리는 호동왕자를 왕검성으로 초대하였고 호동은 못이기는 척 받아 드렸습니다. 왕검성을 염탐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호동은 낙랑공주에게 한눈에 반해버리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둘은 적대국인 관계로 헤어지고야 말았습니다.

호동을 너무나 사랑한 낙랑공주는 적이 쳐들어 오면 자동으로 북이 울리게 되는 자명고를 찢고야 말았습니다.

 

자명고가 없어진 걸 알게된 호동은 대무신왕에게 보고하여 낙랑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맙니다.

 

허나 공주를 잃게 되어 후에 자결을 하게 됩니다.

 

 

by apple_애플 2014. 4. 9. 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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